필그림 파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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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그림 파더스는 17세기 영국 성공회로부터 분리되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아메리카로 이주한 청교도들을 지칭한다. 헨리 8세의 종교 개혁 이후 영국 성공회와 청교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분리주의자들은 탄압을 피해 네덜란드 레이던으로 이주했다. 이후 신대륙 이주를 결정하고,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여 플리머스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들은 왐파노아그족과의 협력을 통해 초기 정착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메이플라워 서약을 통해 자치 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원주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피쿼트 전쟁과 필립왕 전쟁을 겪었다. 필그림 파더스는 미국의 초기 역사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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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그림 파더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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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주요 인물 | 윌리엄 브루스터 윌리엄 브래드퍼드 존 카버 마일스 스탠디쉬 |
출신 | 잉글랜드 |
도착 | 플리머스 식민지 |
종교적 신념 | 칼뱅주의 |
배경 | |
종교적 박해 | 잉글랜드 국교회로부터의 분리주의 제임스 1세의 탄압 |
추구한 가치 | 종교적 자유 |
여정 | |
항해 선박 | 메이플라워호 |
도착 연도 | 1620년 |
정착지 | 플리머스 |
역사적 의의 | |
영향 | 미국의 종교적, 문화적 정체성 형성에 기여 추수감사절의 기원 |
관련 개념 | 필그림 청교도 |
추가 정보 | |
관련 인물 | 존 윈스럽 로저 윌리엄스 |
관련 사건 | 메이플라워 서약 필그림의 진보 |
2.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과 분리주의 운동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영국 성공회를 국교로 확립한 이후,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철저한 교회 개혁을 요구하는 청교도 세력이 성장했다. 이들 중 일부는 기존 국교회 체제에서 벗어나 완전히 독립된 교회를 세우고자 했는데, 이들을 분리주의자라고 부른다. 분리주의자들은 국교회 정책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정부의 탄압을 받게 되었고, 이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2. 1. 헨리 8세의 종교 개혁과 성공회 설립
1527년 헨리 8세의 혼인 무효 문제로 촉발된 교황과의 갈등은 1531년 2월 11일 영국 성직자들이 헨리 8세를 잉글랜드 교회에서의 왕위 지상권을 인정하는 결의를 함으로써 로마 가톨릭교회와 결별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헨리 8세를 파문하자, 1533년 앤 볼린과 재혼했고, 1534년 수장령을 공포하여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고 ‘영국 성공회’를 국교로 삼았다.로마와의 결별 이후 종교개혁 운동이 영국으로 들어와 탄력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성상 파괴, 순례의 폐지, 성인 숭배 폐지 등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영국 성공회는 개신교가 아니었으며, 헨리 8세가 신봉하는 믿음도 가톨릭 그 자체였다. 1539년 잉글랜드 교회의 6개 신조에서 영국 교회가 가톨릭 교회적인 성격을 유지함을 선언하고 있다.
영국 성공회가 공식적으로 로마 교회에서 분리된 것은 1559년이다. 잉글랜드 의회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믿음의 옹호자"로 인정하며 왕위지상령을 채택하고, 반대로 개신교적인 법을 폐지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선택한 길은 "중도"(Via Media|비아 메디아la)라고 불리는 것으로, 잉글랜드에 혼재하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가 서로를 부정하고 배제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길을 택한 현실적인 정책이었다. 또한 여왕은 1563년 성직자 회의에서 《영국 성공회 39개조 신앙고백》을 제정하여 영국 성공회의 국내화를 강화했다. 이때부터 영국의 청교도와 영국 성공회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2. 2. 엘리자베스 1세의 중용 정책과 청교도 운동
헨리 8세가 1534년 수장령을 공포하여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독립하고 영국 성공회를 국교로 삼았지만, 교리적으로는 여전히 가톨릭적 성격을 유지했다. 영국 성공회가 공식적으로 로마 교회로부터 분리된 것은 1559년,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한 후였다. 잉글랜드 의회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교회의 최고 통치자로 인정하는 왕위지상령을 다시 채택했다.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 내에 혼재하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 세력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배제하지 않고 공존을 모색하는 "중도"(Via Media)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당시 영국의 종교적 갈등 상황을 고려한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또한 1563년에는 성직자 회의를 통해 《영국 성공회 39개조 신앙고백》을 제정하여 영국 성공회의 교리적 기반을 다지고 국내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이러한 엘리자베스 1세의 중용 정책과 성공회 강화는 더욱 철저한 교회 개혁을 요구하던 청교도들의 반발을 샀다. 이때부터 청교도와 영국 성공회 간의 대립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교회 개혁을 주장하는 청교도 세력은 더욱 커졌으며, 특히 영국 성공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독립적인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그룹, 즉 분리주의자들이 등장했다. 이들 분리주의자들은 국교회 정책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정부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2. 3. 제임스 1세의 탄압과 스크루비 회중
1603년 즉위한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 국교회를 강력히 지지하고 왕권신수설을 내세워 국왕의 절대 권력을 주장했다. 이는 여러 개신교 교파의 반감을 샀으나, 한편으로는 《흠정역 성경》 편찬을 지시하는 등 종교적인 기여도 있었다. 이후 필그림 파더스로 알려질 이들의 핵심 그룹은 1586년에서 1605년 사이, 노팅엄셔 이스트 렛퍼드 근처 올 세인츠 교구교회의 리처드 클립튼에게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다. 클립튼은 로버트 브라운을 따르는 브라운주의자였다. 이들은 로버트 브라운, 존 그린우드, 헨리 배로우 등이 이끈 분리주의 신념을 가졌다. 잉글랜드 국교회 내에서 개혁을 추구하던 청교도들과 달리, 분리주의자들은 국교회와 완전히 다른 독립적인 교회를 지향했다.[72][3][4]분리주의 운동은 당시 큰 논란거리였다. 1559년 통일령에 따라 잉글랜드 국교회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불법이었고, 불참 시 1실링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비공식적인 예배를 드릴 경우 투옥되거나 더 큰 벌금을 내야 했다.[79] 1592년 반역 종파 법은 브라운주의를 직접적으로 겨냥했다. 이 법에 따라 헨리 배로우, 존 그린우드, 존 펜리는 1593년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펜리는 처형 전 런던의 분리주의자들에게 박해를 피해 이민할 것을 촉구했고, 그의 사후 일부는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윌리엄 브루스터는 전직 네덜란드 외교관 보좌관으로, 당시 스크루비 마을의 우체국장이자 요크 대주교의 집행관으로 일하며 스크루비 장원에 살고 있었다. 그는 클립튼의 설교에 감명받아, 링컨셔 게인즈버러에서 존 스미스가 이끄는 분리주의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했다.[73][10]
브루스터가 활동하던 시기(1595–1606)의 요크 대주교 매튜 허튼은 청교도들에게는 어느 정도 공감을 표했다. 그는 1604년 제임스 1세의 국무장관 로버트 세실에게 보낸 편지에서 청교도들이 의식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종교의 본질에는 동의하며 국왕에게 충성한다고 언급했다.
청교도들은 예배와 의식이 다르지만, 우리의 종교적 신성에는 동의를 보내고 있으며, 그들 대부분은 폐하를 공경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그들이 순응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교황신봉자들은 반대의 입장이며, 종교적 관점이 매우 다르며, 교황의 권위와 교황의 종교가 확립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74][5]
그러나 제임스 1세는 1604년 햄프턴 코트 회담에서 청교도들의 개혁 요구를 대부분 거부하고, 오직 성경의 새로운 영어 번역본(흠정역 성경) 작업만을 허락했다. 이 회의 결과에 따라 1605년 클립튼은 비순응주의자로 선언되어 밥워스에서의 직위를 박탈당했고, 브루스터는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1606년 허튼 대주교가 사망하고 토비어스 매튜가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제임스 1세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매튜는[7] 요크 대교구에서 분리주의자, 가톨릭교도 등 모든 비순응주의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강력한 탄압을 시작했다. 순응하지 않는 성직자들은 해임되었고, 분리주의자들은 체포, 벌금형, 투옥에 처해졌으며 일부는 국외로 추방되었다.[75][76][8][9]
이러한 탄압 속에서 브루스터는 스크루비 장원에서 비밀리에 집회를 열기 시작했다. 1606년부터 시작된 이 집회는 클립튼이 목사, 존 로빈슨이 교사, 브루스터가 장로 역할을 맡았다. 얼마 후 존 스미스와 게인즈버러의 신도들은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78][11] 브루스터 역시 국교회 예배 불참을 이유로 20GBP의 벌금을 부과받았고,[77][12] 이로 인해 1607년 9월 우체국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13] 결국 스크루비 회중은 존 스미스 그룹을 따라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78][3][14]

스크루비 회중의 일원이었던 오스터필드 출신의 윌리엄 브래드퍼드는 훗날 《플리머스 식민지》(Of Plymouth Plantation)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 이후 그들은 평화로운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 없었고, 사방에서 쫓겨나 박해를 받아 이전의 고통은 지금 그들에게 닥친 것에 비하면 벼룩에 물린 것에 불과했다. 어떤 사람들은 잡혀 감옥에 갇혔고, 다른 사람들은 집이 포위되어 밤낮으로 감시를 받았으며, 간신히 그들의 손에서 벗어났고; 대부분은 도망쳐서 그들의 집과 거주지를 떠나 생계 수단을 버려야 했다.[3]

비록 노골적인 박해는 아니었을지라도, 교인들은 교회의 감시와 이웃들의 조롱, 비난, 배척 속에서 고통받았다.[79]
3. 네덜란드 레이던에서의 망명 생활
1609년경 암스테르담에서의 내부 갈등을 피해 존 로빈슨이 이끄는 분리주의 회중은 네덜란드 레이던으로 이주했다.[80] 레이던은 번성하는 산업 도시였지만,[15][16] 많은 교인들은 언어 장벽과 낯선 환경 속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17][18] 윌리엄 브루스터와 같은 일부 지도자들은 인쇄 활동[20] 등을 통해 공동체를 이끌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네덜란드 문화에 동화될 위험[21]과 불안정한 정치 상황[21] 속에서 공동체 유지에 대한 위기감이 커졌다.[22] 결국 이들은 잉글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종교적 이상을 지키기 위해 아메리카로의 이주를 모색하게 된다.
3. 1. 암스테르담으로의 이주와 분열
잉글랜드를 떠나는 공식적인 서류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집회 회원들은 뇌물을 주고 통행증을 얻어 밤중에 몰래 탈출을 시도해야 했다. 1607년 브루스터가 사임한 이후 문서로 기록된 첫 시도는 집회 참가자 중 한 명이 링컨셔의 보스톤에서 배 한 척을 빌린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속임수였고, 배에 타자마자 모든 인원이 체포되어 한 달 동안 감옥에 갇혔다. 이후 7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풀려났다. 지도자들이 얼마나 더 오래 감금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년 후 지도자들 모두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데 성공했다.두 번째 출발 시도는 1608년 봄에 있었다. 네덜란드인 상인과 미리 계획하여 링컨셔의 그림즈비 근처, 이밍햄의 험버 강 어귀에서 교인들을 태워 가기로 약속했다. 교인 중 남성들이 배에 오르자, 무장한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을 본 선원들은 여성과 아이들이 미처 타기도 전에 서둘러 배를 출발시켰다. 남겨진 여성과 아이들은 체포되었으나, 별다른 처벌 없이 풀려났다.
결국 약 150명의 교인들은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여, 이미 그곳에 와 있던 스미스 무리와 합류했다. 당시 스미스 무리는 바로우의 후계자인 프란시스 존슨(1562–1617)이 이끌던 추방영국교회와 연합한 상태였다. 스크루비 집회 무리는 스미스와 존슨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기 때문에 암스테르담에서 약 1년간 머물렀다. 이는 스미스가 침례교의 이상을 받아들였고, 클립턴과 존슨은 이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로빈슨은 이러한 분쟁에서 교인들을 분리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하여 1609년 레이든으로 이주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레이든에 있는 추방영국교회와 같이 교인들을 재조직하면서 로빈슨은 목사가 되었고, 나이가 더 많았던 클립턴은 암스테르담에 남기로 결정했다.[80]
3. 2. 레이던에서의 정착과 어려움
암스테르담에 정착한 스크루비 교인들은 기존에 있던 추방영국교회의 프란시스 존슨과 새로 합류한 존 스미스 사이의 신학적 긴장 관계(특히 침례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존 로빈슨 목사는 분쟁을 피하고자 1609년 교인들을 이끌고 레이던으로 이주할 허가를 받았다. 나이가 많았던 리처드 클립튼 목사는 암스테르담에 남기로 결정했다.[80]
당시 인구 약 3만 명의 도시였던 레이던은 번성하는 산업 중심지였다.[15][16] 교인들은 피에테르스케르크 교회 맞은편 클로크스티에그 뒤편의 작은 주택들에 자리를 잡았다. 많은 이들이 레이던 대학교에서 일하거나 섬유, 인쇄, 양조업 등에 종사하며 생계를 유지했다.[16] 하지만 농촌 출신이거나 언어 장벽에 부딪힌 사람들은 충분한 수입을 얻기 어려웠고, 이들을 위해 로빈슨과 다른 세 명의 교인이 공동으로 부동산을 구입하여 숙소를 마련해주기도 했다.[17]
윌리엄 브래드퍼드는 훗날 레이던에서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러한 이유와 다른 이유로 그들은 아름다운 도시이자 좋은 입지를 가진 레이던으로 이주했지만, 최근에 많은 학자들이 있었던 대학으로 인해 더욱 유명해졌다. 그러나 암스테르담이 누리는 해상 무역이 부족하여 그들의 외부 생계 수단과 재산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곳에 자리를 잡은 그들은 최선을 다해 그러한 거래와 고용에 종사했으며, 그 어떤 부보다 평화와 영적 안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경쟁력 있고 편안한 생활을 꾸려나갔지만, 힘든 지속적인 노동이 따랐다.[18]
윌리엄 브루스터는 레이던 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존 로빈슨은 1615년 박사 학위를 위해 대학에 등록하여 당시 논쟁적이던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간의 신학 토론에 참여하며 칼뱅주의 입장을 옹호했다.[19] 브루스터는 1616년경 토마스 브루어의 자금 지원을 받아 인쇄 장비를 마련하고, 이러한 신학 논쟁과 관련된 글들을 출판하기 시작했다.[20]

그러나 레이던에서의 생활은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다. 네덜란드의 문화와 언어는 영국에서 온 교인들에게 낯설고 배우기 힘든 장벽이었다.[21] 또한, 그들은 네덜란드 사회의 도덕적 기준이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느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녀들이 점차 네덜란드 문화에 동화되는 것을 우려했다.[21] 불안정한 네덜란드의 정치 상황 역시 걱정거리였다.[21] 결국 교인들은 레이던에 계속 머무를 경우, 자신들의 종교적 공동체와 정체성을 잃게 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22] 이러한 복합적인 이유로 그들은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다시 한번 이주를 고려하게 되었다.
3. 3. 신대륙 이주 결정
1617년경, 레이던의 분리주의 회중은 어느 정도 안정과 안전을 확보했지만,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교인들 다수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립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일부는 모아둔 재산을 모두 소진하고 결국 잉글랜드로 돌아갔다고 기록했다. 지도자들은 이런 추세가 계속되어 교회가 유지되기 어려워질 것을 우려했다. 또한 레이던의 고용 환경이 좋지 않아 새로운 사람들이 합류하기를 주저했고, 젊은 세대는 더 나은 일자리와 모험을 찾아 떠나기도 했다. 개신교의 영향력이 강한 네덜란드를 벗어나 다른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펼칠 가능성도 이주를 고려하게 된 요인 중 하나였다.[81][23]브래드포드는 네덜란드에서의 생활고에 대한 좌절감 등 몇 가지 이주 이유를 제시했다. 더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자녀들이 주변의 좋지 않은 환경에 물들거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며, "세상의 먼 곳에서 그리스도 왕국의 복음을 전파하고 발전시키려는 큰 희망"을 이루기 위함이었다.[81][23] 에드워드 윈슬로 역시 비슷한 이유를 들었다. 그는 경제적 어려움과 선교 가능성 외에도, 공동체가 잉글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 문화, 언어를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들은 레이던의 잉글랜드 교회가 현지 사회에 크게 기여할 부분이 없다고 판단했다.[82][24]
하지만 아메리카 이주에는 많은 불확실성이 따랐다. 이미 여러 식민지 개척 시도가 실패했다는 소문이 있었고, 현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적대적일 수 있다는 두려움, 식량과 물 부족, 미지의 질병에 대한 공포, 그리고 대서양 항해 자체의 위험 등이 존재했다. 이러한 불안감 속에서도 이주를 결정하게 된 또 다른 배경은 당시 네덜란드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이었다. 80년 전쟁의 불안한 휴전 상태가 위태로워지고 있었고, 스페인의 위협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었다.[81][23]
이주 후보지로는 네덜란드가 이미 에세키보 식민지를 개척한 남미의 가이아나와 북미의 버지니아 식민지 인근 지역이 거론되었다. 버지니아는 기존 식민지가 있어 안전과 무역 기회 면에서 더 매력적이었지만, 잉글랜드의 정치 환경을 답습하여 종교적 자유가 제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최종적으로는 런던 회사가 관리하는 광대한 영토 중 허드슨강 어귀 지역이 정착지로 고려되었다. 이곳은 사회적, 종교적 갈등의 우려를 줄이면서도 기존 식민지와 가까워 군사적, 경제적 이점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이 지역은 나중에 네덜란드 식민지 뉴네덜란드가 된다.)[81][25]
로버트 커시먼과 존 카버가 토지 특허를 받기 위해 잉글랜드로 파견되었다. 런던 회사 내부의 문제로 협상이 지연되었으나, 1619년 6월 9일(구력)/19일(신력)에 존 윈코브(John Wincob)라는 인물의 이름으로 특허가 발급되었다.[26] 다만 국왕 제임스 1세는 이들의 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았다.[27]
이후에도 런던 회사 내부의 문제로 준비는 계속 지연되었고, 그 사이 경쟁 관계에 있던 네덜란드 회사들이 필그림들에게 허드슨강 지역 정착을 제안하기도 했다.[27] 이 협상은 영국 상인 토마스 웨스턴의 개입으로 중단되었다. 웨스턴은 런던 회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장담하며 필그림들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28] 그는 잉글랜드의 관계자들이 기존 버지니아 영토 북쪽에 뉴잉글랜드라는 새로운 지역에 대한 토지 불하를 받았다고 알렸다. 이는 부분적으로만 사실이었는데, 뉴잉글랜드 플리머스 의회가 정식으로 헌장을 받은 것은 1620년 말이 되어서였다. 이 지역은 수익성 높은 어업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되었고, 기존 버지니아 정부의 통제 밖에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28][29]
그러나 웨스턴과의 협상 과정에서 필그림들이 모르는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첫째, 새로운 투자자들이 참여하면서 계약 조건이 변경되었는데, 7년 계약 기간이 끝나면 정착지의 토지와 재산 절반을 투자자들에게 귀속시킨다는 내용이었다. 둘째, 또한 원래 계약에는 정착민 각자가 개인적인 용무를 위해 일주일에 이틀을 사용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지만, 필그림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최종 계약에서 이 조항이 삭제되었다.[28]
이러한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윌리엄 브루스터는 스코틀랜드의 종교 문제에 연루되었다. 1618년 제임스 1세가 스코틀랜드 장로회의 전통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퍼스 5개 조항을 공포하자, 브루스터는 이를 비판하는 소책자를 비밀리에 인쇄하여 1619년 4월 스코틀랜드로 밀반입했다. 이 소책자의 출처가 레이던으로 밝혀지자 영국 당국은 브루스터 체포에 나섰다. 주네덜란드 영국 대사 더들리 칼튼은 네덜란드 정부에 브루스터의 신병 인도를 압박했고, 네덜란드 당국은 대신 자금책이었던 토마스 브루어(Thomas Brewer)를 9월에 체포했다. 브루스터는 필그림들이 아메리카로 떠날 때까지 행방이 묘연했고, 네덜란드 당국은 그의 인쇄 장비를 압수했다. 한편, 잉글랜드로 송환된 브루어는 1620년까지 조사 과정에서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는 결국 지속적인 종교 출판 활동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 1626년 14년형을 선고받았다.[30] 이 사건은 필그림 지도부가 네덜란드를 떠나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야 한다는 결정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되었을 수 있다.
4. 신대륙으로의 이주 준비
1603년 즉위한 제임스 1세는 영국 성공회를 강력히 지지하고 왕권신수설을 내세워 국왕의 절대성을 주장했다. 이는 여러 개신교 교파의 반감을 샀으나, 《흠정역 성경》 출판을 지시하는 등 종교적 공헌도 있었다. 이후 필그림 파더스의 핵심이 되는 그룹은 노팅엄셔의 올 세인츠 교구교회(All Saints' Parish Church)에서 리처드 클립튼 목사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다. 이들은 로버트 브라운, 존 그린우드, 헨리 바로우 등이 주도한 분리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아, 영국 성공회와는 다른 독자적인 신앙 노선을 추구했다. 영국 성공회 내 개혁을 추구했던 청교도와 달리, 이들 분리주의자들은 성공회의 권위와 전통을 따르지 않고 독립적인 예배와 조직을 유지하고자 했다.[72] 전 외교관이었던 윌리엄 브루스터는 스크루비(Scrooby) 장원에 살면서 클립턴의 설교에 감명받아, 게인즈버러의 존 스미스가 이끄는 분리주의 예배에 참여하기 시작했다.[73]
분리주의자들은 당시 법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다. 1558년 제정된 《통일령》(Act of Uniformity)은 영국 성공회 예배 불참 시 벌금을 부과했고, 불법적인 예배는 금고형과 더 큰 벌금으로 처벌했다. 이로 인해 바로와 그린우드는 1593년 처형되기도 했다. 브루스터가 활동하던 시기(1595–1606)의 요크 대주교 매튜 휴턴은 청교도들에게는 비교적 관대했으나 분리주의자들에게는 아니었다. 그는 1604년 로버트 세실에게 보낸 편지에서 "청교도들은 예배와 의식이 다르지만, 우리의 종교적 신성에는 동의를 보내고 있으며, 그들 대부분은 폐하를 공경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그들이 순응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교황신봉자들은 반대의 입장이며, 종교적 관점이 매우 다르며, 교황의 권위와 교황의 종교가 확립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74]라고 언급하며 청교도와 분리주의자, 가톨릭교도에 대한 시각차를 드러냈다. 제임스 1세 즉위 후 열린 1604년 햄프턴 궁정 회의에서 청교도들의 요구는 대부분 거부되었고, 이는 분리주의자들에 대한 압박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605년 클립턴은 비순응주의자로 선언되어 직위를 박탈당했고, 브루스터는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1604년 휴턴의 뒤를 이은 토비어스 매튜 대주교는 제임스 1세의 충실한 지지자로서, 교구 내 비순응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불복종 성직자들은 교체되었고, 분리주의자들은 체포, 벌금 부과, 투옥 등의 처벌을 받았으며 일부는 국외로 추방되었다.[75][76] 이러한 상황 속에서 브루스터는 스크루비 장원에서 비밀리에 집회를 열기 시작했다. 1606년부터 시작된 이 집회에는 클립턴이 목사로, 존 로빈슨이 교목으로, 브루스터가 장로로 참여했다. 얼마 후 게인즈버러의 스미스 그룹은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브루스터 역시 교회 예배 불참으로 벌금을 부과받고[77] 1607년 우체국장직에서 물러났으며, 스크루비 공동체는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78]
당시 상황에 대해, 훗날 플리머스 식민지의 총독이 되는 윌리엄 브래드퍼드는 그의 저서 《플리머스 플랜테이션에 대해》에서 "이런 일들이 있고 난 후에는 평화롭게 지속될 수 없었고, 다방면으로 사냥과 박해를 당했다. 이전의 고통은 이때와 비교를 하면, 벼룩에게 물린 정도였다. 어떤 이들은 체포를 당해 구금되었으며, 어떤 이들은 집에 연금을 당하고 밤낮으로 감시를 당했으며, 그들의 손을 좀처럼 벗어날 수 없어서 집을 떠날 수도 없었다."라고 기록했다. 컬럼비아 백과사전 역시 노골적인 박해는 아니었더라도, 교인들이 지속적인 감시와 이웃들의 조롱, 비난, 배척에 시달렸다고 기술한다.[79]
네덜란드 레이던(Leiden)에 정착한 분리주의자들은 점차 경제적 어려움과 공동체 유지의 한계에 직면하며 새로운 이주지를 모색하게 되었다(#이주 후보지 물색과 협상 참고). 신대륙 이주가 결정되자, 모든 교인이 한 번에 떠날 수는 없었다. 시간과 비용의 제약으로 인해, 우선 더 젊고 건강한 구성원들이 먼저 출발하고 나머지는 형편이 되는 대로 합류하기로 했다. 로빈슨 목사는 레이던에 남아 남은 교인들을 돌보고, 브루스터 장로가 신대륙으로 향하는 그룹을 이끌기로 결정했다.[31] 신대륙에 세워질 교회는 독립적으로 운영되지만, 두 공동체 간 교류는 자유롭게 하기로 합의했다. 개인적, 사업적 문제들이 정리된 후, 필그림들은 이주에 필요한 물품과 선박 마련에 착수했다.[28][32]
4. 1. 이주 후보지 물색과 협상
1617년경, 네덜란드 레이던에 정착한 분리파 교인들은 어느 정도 안정과 안전을 확보했지만, 여전히 여러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교인 다수가 나이가 들어가며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모아둔 재산을 다 쓰고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지도자들은 이러한 이탈이 계속되어 공동체가 유지되기 어려울 것을 우려했다. 또한 레이던의 경제 상황은 새로운 이주민 유입을 어렵게 했으며, 젊은 세대는 더 나은 일자리와 모험을 찾아 떠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신교의 영향력이 적은 먼 곳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려는 열망도 이주를 고려하게 된 배경 중 하나였다.[81][23]윌리엄 브래드포드는 네덜란드에서의 고된 삶에 대한 좌절감, 더 나은 삶의 터전을 찾아 공동체를 확장하려는 희망, 자녀들이 세속적인 유혹에 빠지는 것을 막으려는 염려, 그리고 "세상의 먼 곳에서 그리스도 왕국의 복음을 전파하고 발전시키려는 위대한 희망" 등을 이주의 이유로 들었다.[81][23] 에드워드 윈슬로 역시 경제적 어려움과 선교 가능성 외에도 공동체가 잉글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 문화, 언어를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들은 레이던의 잉글랜드 교회가 현지 사회에 기여할 바가 거의 없다고 여기기도 했다.[82][24]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이주에는 많은 불확실성과 위험이 따랐다. 이미 여러 식민지 개척 시도가 실패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충돌, 식량 및 물 부족, 미지의 질병, 위험한 항해 등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이러한 불안감 속에서도 이주를 추진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당시 네덜란드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이었다. 스페인과의 80년 전쟁 휴전이 위태로워지면서 전쟁 재발과 스페인의 위협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었다.[81][23]
이주 후보지로는 네덜란드가 이미 에세키보 식민지를 개척한 남미의 가이아나와 북미의 버지니아 식민지 인근 지역이 거론되었다. 버지니아는 기존 식민지가 있어 안전과 무역 면에서 유리했지만, 잉글랜드의 정치적 환경과 너무 유사하여 종교적 자유를 완전히 누리기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최종적으로는 런던 회사가 관리하던 허드슨강 하구 지역이 유력한 후보지로 떠올랐다. 이곳은 기존 식민지와 가까워 군사적, 경제적 이점을 누리면서도 사회적, 종교적 갈등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울 것으로 기대되었다.[25]
로버트 커시먼과 존 카버가 토지 사용 허가를 받기 위해 잉글랜드로 파견되었다. 런던 회사 내부의 문제로 협상은 지연되었으나, 1619년 6월 9일(구력)/19일(신력) 존 윈콥(John Wyncob)의 이름으로 특허가 확보되었다.[26] 다만, 제임스 1세는 레이던 분리파의 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았다.[27]
그러나 런던 회사 내부 문제는 계속되었고 준비는 지지부진했다. 이 틈을 타 경쟁 관계인 네덜란드 회사들이 접근하여 허드슨강 지역 정착을 제안하기도 했다.[27] 하지만 잉글랜드 상인 토마스 웨스턴이 나타나 런던 회사의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나서면서 네덜란드와의 협상은 중단되었다.[28] 런던 회사는 네덜란드가 완전히 자리를 잡기 전에 허드슨 강을 탐험한 지역을 차지하려고 했고, 최초의 네덜란드 정착민은 1624년까지 그 지역에 도착하지 않았다.
웨스턴은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는데, 잉글랜드의 관계자들이 기존의 버지니아 영토 북쪽에 뉴잉글랜드라고 불릴 토지 보조금을 받았다고 레이던 그룹에게 말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만 사실이었다. 새로운 보조금은 실제로 통과되었지만, 뉴잉글랜드 플리머스 의회가 1620년 말에 헌장을 받을 때까지는 아니었다. 이 지역에서 수익성 있는 어업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기존의 버지니아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28][29]
두 번째 변화는 더 큰 그룹에게 알리지 않은 잉글랜드의 관계자들만 알고 있었다. 새로운 투자자들이 참여하여 정착된 토지와 재산의 절반이 7년 계약 종료 시 투자자에게 귀속되도록 조건을 변경하기를 원했다. 또한, 원래 계약에는 각 정착민이 개인적인 사업을 위해 일주일에 이틀을 가질 수 있도록 허용하는 조항이 있었지만, 이 조항은 필그림 파더스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최종 계약에서 삭제되었다.[28]
이러한 협상 속에서 윌리엄 브루스터는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불안에 연루되었다. 1618년,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 전통을 침해하려는 시도로 여겨진 퍼스 5개 조항을 공포했다. 브루스터는 이 법을 비판하는 여러 소책자를 발행했고, 1619년 4월까지 스코틀랜드로 밀반입되었다. 이 소책자는 레이던으로 추적되었고, 영국 당국은 브루스터를 체포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영국 대사 더들리 칼튼은 이 상황을 인지하고 네덜란드 정부에 브루스터를 인도할 것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네덜란드는 9월에 재정가 토마스 브루어(Thomas Brewer)를 체포함으로써 대응했다. 브루스터의 행방은 그 후 필그림 파더스가 아메리카로 떠날 때까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네덜란드 당국은 그가 소책자를 인쇄하는 데 사용했던 조판 자료를 압수했다. 한편, 브루어는 심문을 위해 잉글랜드로 보내졌고, 1620년까지 정부 관리들에게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는 결국 잉글랜드에서 그의 지속적인 종교 간행 활동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1626년에 14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30]
4. 2. 런던 회사와의 협상과 계약 조건 변경
땅을 개척하기 위한 허가를 얻기 위해 로버트 커시먼과 존 카버가 잉글랜드로 파견되었다.[25] 그들의 협상은 런던 회사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지연되었지만, 결국 1619년 6월 9일(구력)/6월 19일(신력) 존 윈콥(John Wincob)의 이름으로 토지 특허(land patent)가 확보되었다.[26] 이 특허는 레이던 종교 집단의 종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는 국왕의 조건 하에 허가되었다.[27]그러나 런던 회사 내부의 문제가 계속되면서 준비는 계속 지연되었다. 이 시기에 런던 회사의 경쟁 관계에 있던 네덜란드 회사들이 접근하여 허드슨 강 지역 정착 가능성을 제안하기도 했다.[27] 이러한 네덜란드와의 협상은 잉글랜드의 상인 토마스 웨스턴의 개입으로 중단되었다. 웨스턴은 런던 회사의 지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장담하며 필그림 파더스를 설득했다.[28] 런던 회사는 네덜란드가 완전히 자리 잡기 전에 허드슨 강 유역을 확보하려 했으며, 실제로 네덜란드 정착민들은 1624년까지 그 지역에 도착하지 않았다.
웨스턴은 중요한 변경 사항을 가져왔다. 그는 기존의 버지니아 영토 북쪽에 뉴잉글랜드라고 불릴 지역의 토지 보조금을 확보했다고 레이던 그룹에게 알렸다. 하지만 이는 부분적으로만 사실이었고, 새로운 보조금은 뉴잉글랜드 플리머스 의회가 1620년 말에 헌장을 받을 때까지는 공식적으로 유효하지 않았다. 이 지역은 수익성 높은 어업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되었고, 기존 버지니아 정부의 통제 밖에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28][29]
두 번째 중요한 변경 사항은 잉글랜드의 관계자들만 알고 있었으며, 레이던의 더 큰 그룹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새로운 투자자들이 참여하면서 계약 조건이 변경되었는데, 7년 계약 기간이 끝나면 정착된 토지와 재산의 절반이 투자자들에게 귀속되도록 한 것이다. 또한, 원래 계약에는 각 정착민이 개인적인 용무를 위해 일주일에 이틀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조항이 있었으나, 이 조항은 필그림 파더스가 모르는 사이에 최종 계약에서 삭제되었다.[28]
4. 3. 윌리엄 브루스터의 견제
아메리카 이주를 위한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윌리엄 브루스터는 스코틀랜드에서 발생한 종교적 불안과 관련된 문제에 휘말리게 되었다. 1618년, 제임스 국왕은 퍼스 5개 조항을 공포했는데, 이는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전통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졌다. 브루스터는 이 법을 비판하는 여러 소책자를 출판했고, 이 책자들은 1619년 4월까지 스코틀랜드로 비밀리에 유입되었다. 영국 당국은 이 소책자들의 출처가 네덜란드 레이던임을 추적해냈고, 브루스터를 체포하려고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30]영국 대사 더들리 칼튼은 이 상황을 인지하고 네덜란드 정부에 브루스터를 인도하라고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네덜란드 당국은 9월에 브루스터의 재정 담당자였던 토마스 브루어를 대신 체포했다. 브루스터의 행방은 이후 식민지 개척자들이 네덜란드를 떠날 때까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네덜란드 당국은 그가 소책자 인쇄에 사용했던 조판 자료를 압수했다. 한편, 토마스 브루어는 심문을 위해 잉글랜드로 보내졌고, 1620년까지 정부 관리들의 심문을 회피하며 시간을 끌었다. 결국 브루어는 잉글랜드에서 불법 종교 간행물 발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1626년에 14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30]
4. 4. 출항 준비와 스피드웰 호의 문제
첫 이주에는 모든 교인이 참여할 수 없었다. 시간 제약과 한정된 경비 및 물품 때문에, 우선 젊고 건강한 사람들 위주로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남은 교인들은 형편이 되는 대로 나중에 합류하기로 했다.[31] 존 로빈슨 목사는 다수의 교인과 함께 레이던에 남고, 윌리엄 브루스터 장로가 미국으로 이주할 교인들을 이끌기로 했다. 미국에 세워질 교회는 독립적으로 운영하되, 유럽과 신대륙을 오가는 교인들에게는 양쪽 교회의 자격을 자동으로 부여하기로 합의했다.개인적인 문제와 사업 관련 사항들이 정리되자, 필그림들은 이주에 필요한 물품과 작은 배 ''스피드웰''(Speedwell)을 마련했다. 스피드웰은 네덜란드에서 출발하여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일부 승객을 수송하고, 미국 도착 후 첫 해 동안 어업과 정착 지원 활동에 사용될 예정이었다. 이를 위해 선원도 고용되었다. 더 큰 배인 ''메이플라워''(Mayflower)는 승객 수송과 탐험을 위해 임대했다.[84][87][28][32]


1620년 7월, 스피드웰은 레이던을 떠나온 교인들을 태우고 델프쉐이븐 항구를 출발했다. 잉글랜드 햄프셔주의 사우샘프턴에 도착하여 메이플라워 호 및 투자자들이 모집한 다른 정착민들과 합류했다. 최종 준비를 마친 두 배는 8월 5일 미국을 향해 출항했다.[87]
그러나 출항 직후 스피드웰의 선원들이 배에 누수가 발생했다고 보고했고, 두 배는 데번의 다트머스로 회항해야 했다. 그곳에서 배를 수리하고 다시 출발했지만, 얼마 가지 못해 또다시 누수가 발생하여 데번의 플리머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스피드웰은 항해에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어 매각되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일부 선원들이 배에서 계속 일해야 하는 연간 계약을 파기하기 위해 고의로 누수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스피드웰 호의 선장과 일부 선원들은 메이플라워 호로 옮겨 타 항해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5. 메이플라워 호의 항해와 플리머스 도착
1620년 여름, 필그림 파더스는 네덜란드 델프샤번에서 ''스피드웰'' 호를 타고 잉글랜드 사우스햄턴으로 이동하여 ''메이플라워'' 호와 합류했다. 두 척의 배는 함께 아메리카 대륙을 향해 출발했지만, ''스피드웰'' 호에 계속해서 누수가 발생하는 문제가 생겼다. 결국 ''스피드웰'' 호는 항해에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어 포기되었고, 모든 승객과 물자는 ''메이플라워'' 호 한 척에 옮겨 실어야 했다.[34]
1620년 9월 6일(구력)/9월 16일(신력), 102명의 승객을 태운 ''메이플라워'' 호는 플리머스 항을 떠나 단독으로 대서양 횡단길에 올랐다. 약 65일간의 험난한 항해 끝에 1620년 11월 9일, 마침내 케이프코드의 해안을 발견했다.[39] 원래 목적지였던 허드슨강으로 가려 했으나, 거친 바다와 얕은 여울 때문에 항해를 포기하고 11월 11일(구력)/11월 21일(신력) 프로빈스타운 항구에 닻을 내렸다.[37][40]
정식 정착 허가 없이 도착한 상황에서 일부 승객들 사이에 혼란이 일자,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성인 남성 41명은 배 위에서 메이플라워 서약에 서명했다. 이 서약은 사회 계약에 기반하여 다수결 원칙에 따라 스스로를 다스리는 시민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약속으로, 이후 미국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고 평가받는다.[94][43]
탐사 끝에 필그림들은 1614년 존 스미스가 "뉴 플리머스"라고 이름 붙인 지역에 최종적으로 정착하기로 결정했다.[68] 그러나 새로운 땅에서의 첫 겨울은 혹독했다. 추위와 질병, 식량 부족으로 1621년 봄까지 절반가량의 이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어려움 속에서 필그림들은 인근에 살던 아메리카 원주민 왐파노아그족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부족의 일원인 스콴토는 과거 잉글랜드에 끌려갔던 경험 덕분에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필그림들에게 옥수수 재배법과 사냥, 낚시 등 생존에 필요한 기술들을 가르쳐 주었다.
1621년 가을, 필그림들은 왐파노아그족의 도움 덕분에 첫 수확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이에 감사하며 왐파노아그족을 초대하여 함께 연회를 열었는데, 이 행사는 오늘날 추수감사절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세워진 뉴 플리머스는 이후 뉴잉글랜드 지역 최초의 성공적인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5. 1. 대서양 횡단과 고난

원래 '스위프트슈어'라는 이름이었던 스피드웰 호는 1577년에 건조된 약 60962.82kg급 선박으로, 과거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한 영국 함대의 일부였다. 1620년 7월, 레이던의 분리주의자 그룹은 델프샤번에서 스피드웰 호에 탑승했다.[33] 이들은 햄프셔 주의 사우스햄턴으로 이동하여, 투자자들이 모집한 추가 이주민들과 함께 메이플라워 호와 합류했다. 최종 준비를 마친 두 척의 배는 8월 5일(구력)/8월 15일(신력)에 항해를 시작했다.[32]
그러나 출항 직후 스피드웰 호의 선원들은 배에 물이 샌다고 보고했고, 두 배는 데번 주의 다트머스로 회항해야 했다. 누수를 수리하고 다시 출항했지만, 이번에는 데번 주의 플리머스까지만 갈 수 있었다. 결국 스피드웰 호는 항해에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어 매각되었고, 배의 선장과 일부 선원은 메이플라워 호로 옮겨 탔다. 윌리엄 브래드퍼드는 스피드웰 호가 "과도하게 마스트를 설치하여" 선체에 부담을 주었을 것이라고 관찰했으며, 선원들이 1년 동안의 약속을 포기하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배에 물이 새도록 했을 수도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승객 로버트 쿠시먼은 누수가 헐거운 판자 때문에 발생했다고 적었다.[34]
스피드웰 호를 포기하면서 두 배에 실었던 물품과 승객들을 메이플라워 호 한 척에 합쳐야 했다. 총 121명의 승객 중 102명이 메이플라워 호에 탑승하게 되었다. 이들 중 절반가량은 레이던에서 온 사람들이었고, 성인 중 약 28명(혹은 30명[35])이 분리주의 교회의 교인이었다. 마침내 메이플라워 호는 1620년 9월 6일(구력)/9월 16일(신력)에 플리머스를 떠나 단독으로 대서양 횡단길에 올랐다.
항해 초기에는 순조로웠으나, 곧 강한 서풍과 폭풍우에 시달렸다. 거센 폭풍으로 배의 중앙을 받치던 큰 들보(주 빔)에 금이 가는 심각한 손상이 발생했다. 이미 항해 거리의 절반 이상을 왔음에도 불구하고, 선원들은 영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고려할 정도였다. 하지만 필그림들이 가져온 "큰 철제 나사"[88][36](집을 짓거나 사과즙을 짜는 기계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됨)를 이용해 부러진 들보를 받쳐 임시로 수리했고, 항해를 계속할 수 있었다. 항해 중 승객 중 한 명인 존 하울랜드는 폭풍으로 인해 갑판에서 바다로 휩쓸려 갔으나, 물에 늘어져 있던 돛의 밧줄(상 돛 올가미)을 붙잡아 극적으로 구조되기도 했다.
66일간의 고된 항해 끝에 육지에 도착하기 전, 선원 한 명과 승객 한 명이 사망했다. 반면, 항해 중 남자아이가 태어나 바다를 뜻하는 오세아너스(Oceanus)라는 이름이 붙여졌다.[89][90][37][38]
5. 2. 케이프코드 도착과 메이플라워 서약
1620년 11월 9일, 약 65일간의 고된 항해 끝에 메이플라워호 승객들은 마침내 육지를 발견했다. 열악한 환경을 견뎌낸 이들은 윌리엄 브루스터의 주도로 시편 100편을 부르며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89][39] 그들이 도착한 곳은 뉴잉글랜드 영토 내의 케이프코드로 확인되었다.[91]
원래 목적지였던 허드슨강 유역으로 가기 위해 케이프코드 주변을 항해하려 했으나, 모래톱이 많고 '말라바'(오늘날의 모노모이 섬 근처) 주변의 해류가 험난하여 항해를 포기해야 했다.[91][37] 결국 배는 방향을 돌려 11월 21일(율리우스력 11월 11일)경 오늘날의 프로빈스타운 항구에 닻을 내렸다.[89][91][40]
그러나 필그림 파더스가 잉글랜드를 떠날 당시에는 뉴잉글랜드 플리머스 위원회로부터 정착지에 대한 공식적인 허가(특허)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특허는 그들이 항해 중이던 11월 13일(율리우스력 11월 3일)에야 승인되었다.)[85][29] 이전에 버지니아 회사로부터 받은 윈콥 명의의 특허는 이미 무효화된 상태였다. 이러한 법적 불확실성을 인지한 일부 승객들은 특허가 없으므로 투자자들과의 계약을 무시하고 각자 원하는 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주장하며 공동체 이탈 움직임을 보였다.[92][93][41][42]
이러한 혼란 속에서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지도자들은 후에 메이플라워 서약(Mayflower Compact)으로 알려진 짧은 계약서를 작성했다. 이 서약은 "식민지의 전반적인 안녕을 위해 제정될 모든 법률과 규정에 대해 합당한 복종과 순종을 약속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모든 문제를 투표를 통해 결정하는 '시민 정치체'를 구성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이는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인 다수결 원칙에 기반한 자치 규약이었다.[94] 총 102명의 승객 중 성인 남성 41명이 이 서약에 서명함으로써 비준되었다.[43] 서명자 외에도 남성 하인 13명, 여성 하인 3명, 그리고 단기 고용된 선원과 장인들이 공동체에 포함되어 있었다.[44]
서약 체결 후, 존 카버가 식민지의 초대 총독으로 선출되었다. 카버는 메이플라워호를 전세 낸 인물이었으며, 공동체 내에서 가장 존경받고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서약서에 가장 먼저 서명했다.[95][96] 메이플라워 서약은 이후 미국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씨앗이 되었으며, 일부 역사가들은 이를 세계 최초의 성문 헌법으로 평가하기도 한다.[95][96][45][46][47][48]
6. 플리머스 식민지 건설과 원주민과의 관계
1620년 12월, 케이프 코드 지역을 탐사하던 필그림 파더스는 나우셋족과 처음 충돌하는 등[51] 원주민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몇 년 전 토마스 헌트가 이 지역 원주민들을 납치하여 노예로 팔려 했던 사건 등으로 인해 영국인에 대한 불신이 존재했기 때문이다.[42][52] 여러 차례의 탐사 끝에 이들은 전염병으로 인해 주민 대부분이 사망하여 버려진 파툭세트 지역을 정착지로 선정하고 플리머스 식민지 건설을 시작했다.[55][57]
혹독한 첫 겨울 동안 배에서 옮겨온 질병과 괴혈병 등으로 이주민 절반 가까이가 사망하는 등[60] 정착 초기에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1621년 3월 22일, 인근의 강력한 부족인 왐파노아그족의 추장 마사소이트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69], 과거 유럽에 끌려갔다가 돌아와 영어를 할 줄 알았던 원주민 스콴토의 도움으로 옥수수 재배법 등 신대륙에서의 생존 기술을 배워 식량 문제를 해결하며 생존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68] 그 해 가을, 풍성한 수확을 거둔 필그림들은 감사의 의미로 마사소이트와 왐파노아그 부족민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열었는데, 이는 오늘날 미국 추수감사절의 기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68]
그러나 필그림과 일부 원주민 부족 간의 초기 우호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필그림들은 왐파노아그족 외 다른 부족들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며 갈등을 빚었다. 1622년 매사추세츠족 족장을 살해하고[70] 그들의 땅에 정착했으며, 1637년에는 피쿼트족과의 피쿼트 전쟁에서 약 500명을 학살하는 등[70] 폭력적인 방식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결국 마사소이트 사후에는 왐파노아그족과의 관계도 급격히 악화되어, 그의 아들 메타코멧(필립 왕)이 주도한 필립 왕 전쟁(1675-1676)이 발발하여 양측 모두에게 큰 희생을 안겼다.[71] 플리머스 식민지는 이후 뉴잉글랜드 지역의 주요 정착지로 발전했으나, 1691년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가 매사추세츠 만 자치령으로 재편되면서 흡수 통합되어 독립적인 식민지로서의 역사를 마감했다.
6. 1. 최초의 상륙과 탐사
새로운 땅에 도착했지만, 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탐사는 2주 이상 지연되었다. 이는 탐사에 필요한 샬룹 또는 핀네스 같은 소형 배가 메이플라워호에 실리기 위해 부분적으로 해체되었고, 운송 과정에서 추가로 손상되어 수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배가 수리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일부 사람들은 땔감을 구하거나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개인 위생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해변으로 건너갔다.
소형 배의 수리를 기다리는 동안, 마일스 스탠디시(레이던에서 만난 영국 군인으로, 필그림들이 군사 고문으로 합류를 요청했던 인물)와 메이플라워호의 선장 크리스토퍼 존스가 이끄는 탐사대가 꾸려져 몇 차례 해안 탐사에 나섰다. 탐사대는 과거 유럽인이 지었던 것으로 보이는 오래된 집과 쇠솥을 발견했는데, 이는 이전에 이곳을 찾았던 선원들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었다. 또한 최근까지 경작된 흔적이 있는 밭도 발견했다.[49]
탐사대는 모래 언덕 근처에서 인공적으로 쌓은 둔덕을 발견하고 일부를 파헤쳐 원주민의 무덤임을 확인했다. 근처에서 더 최근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비슷한 무덤들을 추가로 발견했는데, 일부 무덤에는 옥수수가 함께 묻혀 있었다. 당시 식량이 부족하여 굶주릴 위험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필그림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생존을 위해 무덤 속 옥수수 일부를 가져갔다. 그들은 나중에 원주민을 만나면 보상할 생각으로 옥수수를 가져갔으며, 가져간 옥수수 일부는 씨앗으로 사용하기 위해 보관하고 나머지는 다시 묻어두었다.
훗날 플리머스 식민지의 총독이 되는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그의 저서 ''플리머스 농장에 관하여''에서 소형 배가 수리된 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그들은 또한 매트로 덮인 인디언의 집 두 채와 그들의 도구 일부를 발견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도망쳐서 볼 수 없었다. 허가 없이 그들은 더 많은 옥수수와 다양한 색상의 콩을 가져갔다. 그들은 나중에 그들을 만났을 때 충분한 만족을 주려고 의도하며 가져갔다. 약 6개월 후에 그들은 그렇게 했다.
>
> 그리고 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이자 이 불쌍한 사람들에게 큰 은혜로 기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음 해에 옥수수를 심을 씨앗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굶어 죽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씨앗이 없었고, 파종 시기가 너무 늦어질 때까지 얻을 가능성도 없었다.
12월에 접어들면서 대부분의 승객과 선원들은 심한 기침을 하며 병에 걸리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또한 괴혈병의 영향으로 고통받았고, 이미 내리기 시작한 눈과 얼음은 탐사 활동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필그림 승객의 거의 절반이 첫 겨울 동안 사망했다.[50]
6. 2. 플리머스 정착지 건설
지역에 대한 철저한 탐사는 그들이 가져온 샬룹(소형 범선)이 ''메이플라워''에 실리기 위해 부분적으로 해체되었고 수송 중에 추가로 손상되었기 때문에 2주 이상 지연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일부 무리는 땔감을 구하고 개인위생을 해결하기 위해 해변으로 건너갔다.
배의 수리를 기다리는 동안, 레이던에서 합류한 영국 군인 마일스 스탠디시와 메이플라워호의 선장 크리스토퍼 존스가 이끄는 탐사대가 구성되었다. 그들은 해안 탐사를 통해 유럽인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오래된 집과 쇠솥, 그리고 최근까지 경작된 밭(옥수수 그루터기 발견)을 찾아냈다.[49]
탐사대는 모래 언덕 근처에서 인공적으로 보이는 둔덕을 발견하고 파헤쳐 원주민의 무덤임을 확인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더 최근에 만들어진 듯한 둔덕들이 있었고, 그 안에서 옥수수가 담긴 바구니를 발견했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옥수수 일부를 가져갔으며, 나머지는 다음 해 파종을 위해 다시 묻어두었다.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나중에 그의 저서 《플리머스 플랜테이션에 대해》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들은 또한 매트로 덮인 인디언의 집 두 채와 그들의 도구 일부를 발견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도망쳐서 볼 수 없었다. 허가 없이 그들은 더 많은 옥수수와 다양한 색상의 콩을 가져갔다. 그들은 나중에 그들을 만났을 때 충분한 만족을 주려고 의도하며 가져갔다. 약 6개월 후에 그들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이자 이 불쌍한 사람들에게 큰 은혜로 기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음 해에 옥수수를 심을 씨앗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굶어 죽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씨앗이 없었고, 파종 시기가 너무 늦어질 때까지 얻을 가능성도 없었다.
12월이 되자 대부분의 승객과 선원들은 괴혈병 등으로 병에 걸려 심한 기침을 했고, 이미 내린 얼음과 눈으로 탐사는 더욱 어려워졌다. 결국 첫 겨울 동안 필그림 승객의 거의 절반이 사망했다.[50]


서쪽으로 계속 탐사를 이어가던 중, 샬루프의 돛대와 방향타가 폭풍에 부러지고 돛을 잃었다. 그들은 노를 저어 현재의 듀스버리와 플리머스 해안 사이에 있는 항구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이틀간 머물며 장비를 수리했는데, 이곳에 처음 발을 디딘 ''메이플라워''호 동료 선원의 이름을 따서 클라크 섬(Clark's Island)이라고 명명했다.[53]
탐사는 1620년 12월 21일(율리우스력 12월 11일) 월요일에 재개되었고, 탐사대는 본토로 건너가 최종 정착지가 될 곳을 조사했다. 매사추세츠에서는 이 날을 ‘선조의 날’(Forefathers' Day)로 기념하며, 전통적으로 플리머스 바위 상륙 전설과 관련짓는다. 이 땅은 이미 개간되어 있었고 높은 언덕이 방어에 유리하여 겨울철 건축에 적합한 장소로 판단되었다.
이곳은 왐파노아그족에게 파툭세트(Patuxet)로 알려진 마을이었으나, 약 3년 전 전염병이 돌아 주민 대부분이 사망하여 버려진 상태였다. 출혈 증상을 동반한 이 "인디언 열병"은 유럽인과의 접촉으로 퍼진 천연두로 추정된다.[54] 전염병은 매우 심각하여 미처 매장되지 못한 시신들이 발견될 정도였다.[55] 이처럼 원주민 마을이 사라지고 인구가 급감한 덕분에 정착민들은 큰 저항 없이 이곳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탐사대는 약 40km[56] 떨어진 곳에 정박해 있던 ''메이플라워''호로 돌아갔고, 배는 12월 26일(율리우스력 12월 16일)에 플리머스 항구로 이동했다. 순례자들은 12월 29일(율리우스력 12월 19일)에 최종적으로 이 언덕 지역을 정착지로 선정했다.[57]
건설은 즉시 시작되어, 1621년 1월 19일(율리우스력 1월 9일)까지 공동으로 사용할 첫 번째 건물(20피트 정사각형 크기)이 거의 완공되었다.[58] 이 시점에서 독신 남성들은 19개의 기존 가구 중 하나에 합류하도록 지시받아 불필요한 집 건설을 피했다.[58] 각 확대 가족에게는 구성원당 폭 0.5 로드(약 2.5m), 길이 3 로드(약 15m)의 부지가 할당되었고,[58] 각자 집을 지었다. 물품들이 해안으로 옮겨졌고, 정착촌은 2월 초에 거의 모습을 갖추었다.[51][59]
첫 번째 집은 완공되자마자 병든 사람들을 위한 병원으로 사용되었다. 2월 말까지 개척민 중 31명이 추가로 사망했으며, 사망자는 계속 늘어났다. 해변 위 언덕인 콜스 힐(Cole's Hill)이 첫 묘지가 되었는데, 원주민들이 정착지의 약화된 실상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무덤 위에 풀이 자라게 두었다.[60]
상륙 이후 3월까지 배에서 얻은 질병 등으로 살아남은 식민지 개척자는 47명에 불과했다.[60] 질병이 가장 심했을 때는 단 6~7명만이 다른 사람들을 돌볼 수 있었다. 같은 기간 ''메이플라워''호 선원들도 절반가량이 사망했다.[42]
1621년 초대 총독 존 카버가 사망하자 윌리엄 브래드포드가 총독으로 선출되어 11년 연속 재임했으며, 1657년 사망할 때까지 여러 차례 총독직을 맡았다. 1621년 3월 22일, 플리머스 정착민들은 왐파노아그족의 추장 마사소이트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메이플라워''호는 1621년 4월 15일(율리우스력 4월 5일)에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브래드포드는 1640년에 세 필지의 유보지를 제외한 플리머스 식민지의 특허권을 자유인들에게 양도했다. 플리머스 식민지는 오늘날의 매사추세츠주 브리스톨 카운티, 플리머스 카운티, 번스터블 카운티 지역을 대략적으로 포함했다.
1691년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가 매사추세츠 만 자치령으로 재편되면서 새로운 헌장이 발급되었고, 플리머스는 독립적인 식민지로서의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다.
6. 3. 왐파노아그 부족과의 만남과 협력

1620년 12월, 필그림 파더스는 케이프 코드 남쪽 지역을 탐사하던 중 나우세트 부족과 처음 마주쳤다. 원주민들은 필그림이 접근하자 도망쳤고, 다음 날 아침에는 화살 공격을 가해왔다. 필그림 측도 총으로 응사하며 쫓았으나, 이후 몇 달간 원주민과의 의미 있는 접촉은 없었다.[97][51]
사실 뉴잉글랜드 지역의 원주민들은 메이플라워호 도착 이전부터 어업과 교역을 위해 간헐적으로 찾아오던 영국인들에게 익숙했다. 하지만 관계가 항상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다. 몇 년 전, 토마스 헌트라는 노예 상인이 파투셋 부족(훗날 플리머스 식민지가 세워질 지역) 20명과 나우세트 부족 7명을 납치하여 유럽에 팔아넘기려 한 사건이 있었다. 이 때문에 많은 원주민 부족, 특히 포카노케트족은 영국인들에 대한 강한 불신과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93][98][42][52]
이때 납치되었던 파투셋 부족민 중 한 명이 바로 스콴토였다. 그는 노예 생활에서 탈출하여 영국으로 건너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었고, 이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가 돌아왔을 때 파투셋 마을은 이미 3년 전 유행한 역병(유럽인들이 옮긴 천연두로 추정)으로 인해 폐허가 되어 있었고, 대부분의 주민이 사망한 상태였다. 이 비극적인 상황은 역설적으로 필그림 파더스가 별다른 저항 없이 플리머스에 정착할 기반을 마련해주었다.[42][52]
정착 초기, 혹독한 겨울과 질병으로 필그림 이주민의 절반 가량이 사망하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다. 생존의 기로에 선 필그림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은 인근의 강력한 부족인 왐파노아그족이었다. 1621년 3월 22일, 필그림 지도자들은 왐파노아그족의 위대한 추장인 마사소이트와 만나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69]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스콴토였다. 영어를 할 줄 알았던 그는 필그림과 왐파노아그족 사이의 통역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필그림에게 신대륙 환경에 맞는 사냥 기술과 옥수수 재배법 등 생존에 필수적인 지식들을 가르쳐 주었다.[68] 스콴토의 도움 덕분에 필그림들은 1621년 가을,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이에 필그림들은 감사의 표시로 마사소이트 추장과 왐파노아그 부족민들을 초대하여 큰 잔치를 열었다. 3일간 이어진 이 잔치는 훗날 미국 추수감사절의 기원으로 여겨진다.[68] 이는 필그림과 왐파노아그족 간의 초기 협력 관계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와 협력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필그림들은 왐파노아그 외 다른 부족들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마사소이트 사후에는 왐파노아그족과의 관계도 점차 악화되어 결국 필립 왕 전쟁과 같은 비극적인 충돌로 이어지게 된다.[70][71]
6. 4. 원주민과의 갈등과 전쟁
1621년 3월 22일, 왐파노아그 부족의 대추장 마사소이트는 필그림과 평화 및 우호 조약을 맺었다.[69] 그러나 필그림은 이 조약을 인디언의 땅을 자신들이 소유하고 정착해도 좋다는 의미로 일방적으로 해석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곧 토지와 식량을 둘러싼 충돌이 발생했다.필그림은 왐파노아그 부족 외 다른 부족들과도 적대 관계를 형성했다. 1622년에는 매사추세츠 부족의 족장을 살해했으며,[70] 1630년에는 이들의 땅에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70] 또한, 필그림이 옮겨온 천연두에 면역력이 없던 매사추세츠 부족민 대다수가 병으로 사망하는 비극도 발생했다.
1636년에는 백인 1명이 피쿼트 부족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필그림은 용의자 인도를 요구했다. 피쿼트 부족이 이를 거부하자 필그림은 피쿼트 마을을 습격하여 1637년 약 500명을 학살하는 《피쿼트 전쟁》을 일으켰다.[70]
이러한 과정 속에서 초기에 평화 조약을 맺었던 왐파노아그 부족과의 관계도 점차 악화되었다. 마사소이트의 아들인 메타코멧(필립 왕)은 아버지가 맺은 조약을 불평등 조약으로 규정하고, 1675년 필그림의 플리머스 정착촌을 공격하며 《필립왕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주변 부족까지 휘말리며 1676년까지 이어졌고, 필그림과 인디언 양측 모두에게 많은 희생자를 냈다.[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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